벚꽃이 피고 지고
고등어조림이 뚝배기 위에서 지글지글 끓고 있었다. 내가 생선 가시와 씨름하는 동안 앞에서는 트럼프와 네타냐후가 짜고 벌인 전쟁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함께 강습을 듣는 사이였다. “일부러 분유 공장 같은 데만 골라서 공격했다잖아.” “선생님, 그거 어디서 봤어요? 아무리 트럼프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해도 미국이 그렇게 만만한 나라가 아니야. 미국 사람들 프로테스트 하는 거 보세요.
고등어조림이 뚝배기 위에서 지글지글 끓고 있었다. 내가 생선 가시와 씨름하는 동안 앞에서는 트럼프와 네타냐후가 짜고 벌인 전쟁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함께 강습을 듣는 사이였다. “일부러 분유 공장 같은 데만 골라서 공격했다잖아.” “선생님, 그거 어디서 봤어요? 아무리 트럼프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해도 미국이 그렇게 만만한 나라가 아니야. 미국 사람들 프로테스트 하는 거 보세요.
소중해서 기록하기를 멈춘 노트가 있다. 벌써 십수 년 전 이야기다. 종로3가 낙원상가 앞, 손수레 행상이 즐비하던 거리에서 만난 수제 노트였다. 손바닥만 한 크기에 빳빳한 표지가 먼저 마음을 사로잡았다. -개인적으로 속지를 보호하지 못하는 표지를 싫어한다.- 갱지 느낌의 속지를 만지작거리다 코를 대보니 진한 종이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1만 원짜리 지폐를 기꺼이
어느 순간, 식목일은 법적 공휴일에서 빠져 있었다. 푸르름을 기념하던 하루도 함께 사라졌다. 초록을 즐기던 날은 기억 속에만 남았다. 나무를 심고 싶어도 아무 데나 심을 수는 없다. 땅은 사적 재산이고, 나무는 허락이 있어야 자란다. 묘목은 조경이 되고, 개인이 나무를 심는 일은 선택지가 되었다. 환경을 위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하고 싶은 일은 할
* “야, 2B0082.” 독방 2B 구역의 0082. 독방으로 소속 변경된 해진에게 붙여진 ‘수감번호’였다. 사실 해진은 이 번호가 내심 마음에 들었다. 왜냐면 해문 교도소 안에서 주인하가 그를 처음 보자마자 불렀던 호칭이라서. “네가 제안한 거니까, 제대로 책임져.” 여기서 살아남을 건지, 끝을 볼 건지. 인하의 말에 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혹시라도 뒤통수칠 거
[청소년 정신건강 칼럼] “이유는 모르겠는데, 그냥 힘들어요.” 생각보다 자주 듣는 말이다. 특별한 일이 없지만 그냥 힘들다. 그리고 이유를 스스로 설명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짧은 말 안에는 그들이 잃어버린 많은 것들을 포함한다. 상실은 죽음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리고 청소년들은 매일 무엇인가를 잃는다. 전학 간 친구, 깨진 관계, 포기한 꿈, 성적 확인 후
여기 두 여자가 있습니다. 한 명은 칼을 쥐고 있고, 다른 한 명은 옆에서 힘을 보탭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공포도, 망설임도 없습니다. 그저 조용하고 숨 막히는 집중만 있을 뿐입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그린 〈유딧이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장면(Judith Slaying Holofernes)〉입니다. 유딧은 적장의 목을 베어 민족을 구한 영웅으로 같은 성서 이야기를 다룬
이 메일이 잘 안보이시나요? 님께 전하는 글진 geulzine의 뉴스레터 05호 FEATURE STORY 4월의 빗소리_농장 시뮬레이션 게임 가슴이 철렁했다는 표현은 너무 진부하다. 그렇지만 이처럼 정확한 표현은 없다. 문자 속 “불합격”이라는 단어만 유난히 선명해 보였다. 또 탈락이다. 하긴 면접 전부터 기분이 이상했다. 오후 3시 면접에 적어도 5분 전에 와 있으라는
가슴이 철렁했다는 표현은 너무 진부하다. 그렇지만 이처럼 정확한 표현은 없다. 문자 속 “불합격”이라는 단어만 유난히 선명해 보였다. 또 탈락이다. 하긴 면접 전부터 기분이 이상했다. 오후 3시 면접에 적어도 5분 전에 와 있으라는 문자가 왔다. 공지가 없어도 15분 전에는 면접장에 도착해 있어야 한다. 나는 35분 거리의 면접장에 가기 위해 2시
흙 속에 오래 머물러 있던 나는 살랑이는 봄바람을 타고 조용하게 새싹이 솟구쳐 오르는 순간을 꿈꾸고 있다. 노란색 꽃이 될지, 붉거나 자주색 꽃이 될지, 어떤 모습으로 피어날지는 아직 알지 못한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조심스럽게 바깥으로 나가보려 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어쩌면 나는 화려한 꽃이 아니라 오래 자라는 나무일지도 모르니까. 계절을 몇 번이나
나는 연필을 좋아한다. 나무와 흑연의 향기, 종이 위에 스치는 서걱거림, 공들인 시간만큼 조금씩 닳아가는 그 감각. 그러나 연필에게는 치명적 단점이 있었다. 쉽게 뭉툭해진다는 것. 끝까지 샤프할 수 없다는 것. 이름처럼 샤프한 샤프의 등장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샤프의 선택권이 넘치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누군가 인생 샤프를 꼽으라고 하면 나는 망설임 없이 ‘제도
더듬더듬 어두운 공간에서 동공이 확장되어 물체의 윤곽이 또렷해지길 기다렸다. 끝없는 까만 복도 안에 우린 숨을 죽였다. 유월이 내 옆에, 호야가 내 품에 있었다. 경계 자세로 몸이 잔뜩 굳어 있는 호야를 가방 안에 넣었다. 어두운 복도를 유월과 나는 되도록 빨리 숨을 죽이며 발소리도 없이 움직였다. 까만 복도 끝에 있는 문 사이로
4월의 햇살은 투명해서 숨을 곳이 없다 쓰레기통을 뒤지는 참새의 부리에선 어제 누군가 뱉어낸 무관심이 뚝뚝 떨어진다 가장 작은 허기가 가장 낮은 곳을 쪼아대며 연명하는 정오의 비린내 길 위엔 제 몸의 무늬가 된 낡은 목줄을 감은 개 한 마리 체온을 기억하는 코끝이 온갖 것이 뒤섞인 바람 속에서 미열의 품을 찾아 킁킁거린다